루게릭 환자의 안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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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창연 작성일 12-07-03 16:00 조회 3,841회본문
전신 마비에다 호흡기에 의지해 삶을 연명해 살아가는 루게릭 환자에게 가장 바라는게 뭐냐고 묻는다면 물론 치료제가 나오길 바란다는 답이 가장 많겠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벗어나서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안락사가 가능하다면 간혹 응하는 환자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가족이 원하는 경우도 있을수 있다.
발병초에 만났던 환자중에 자신은 좀더 진행이 되면 유럽의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는 어느 나라에 가서 죽음을 맞겠다고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엔 그래도 절망 보단 희망을 더많이 갖고 살던 때라 깊게 생각을 하지 않고 들으면서도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그후 정말 그 나라에 가서 죽음을 맞았는진 모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도 절개를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 전해들은 이야기 이지만 어느 환자의 가족들이 형편상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며 기도절개를 극구 반대하여 환자는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처한 상황을 받아 들이고 세상을 떠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주변의 환경이 다르기에 비록 소수일지라도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여론 조사 결과에서 국민의 90%이상이 안락사에 찬성을 한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막상 실행을 하는데는 여러 난관에 부딪히고 어디까지 허용 하는가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선뜻 누군가가 나서서 끝까지 법제화 하지 못하고 꼬리를 감추듯 사라지고 말면서 현실은 안락사란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잠깐의 이슈에 그치고 만적이 있다.
실제로 안락사가 허용 된다고 해도 막상 자신의 배우자와 부모나 자식등에게 처한 상황이라면 그래서 본인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라면 과연 평소에 가지고 있던 소신 처럼 선뜻 선택을 하기는 쉬운 문제는 아닐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당신은 잭을 모른다(You don't know Jack)"에서 주인공 의사가 많은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거기에도 루게릭 환자에게 안락사를 시키는 장면이 세번 나온다.
주인공은 법적 처벌을 받게 되지만 끝까지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그래서 정당하다 주장한다.
누가 이 사람의 행동을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 할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공의 행동을 지지 하며 보았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몸이 나빠지면서 비례해 안락사에 대한 관심도 깊어간다.
나는 할수만 있다면 영화속의 잭처럼 안락사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죽는 날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가 법제화 되는데 미약 하지만 동참 하고 싶다.
2년전 나는 국회의원 회관에서 아래의 말을 했다.
그럼에도 이제는 말을 바꾸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하더라도 지금의 고통 속에선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 잡는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 논쟁에 앞서
원창연
2005년 12월, 의사로부터 근위축측삭경화증(일명 루게릭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진단시 의사는 점차 병이 진행되어 사지를 못 움직이는 상태로 살다가 수년 내에 죽는병이라는 이야기를 하였고, 그래서 나는 담당 의사에게 “앞으로 어떡해야 하냐”고 짧게 물었다. 의사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다. “현재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처음에는 병에 대한 인식이 없고 또 뭔가 다른 치료법이 있을거란 희망을 갖고 여러 가지 대체요법이나 민간요법에 매달려 보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병을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예전에는 결국 기도절개를 해야 하고 이후에 호흡기에 의존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몸은 루게릭이란 병에 점점 더 묶여 가고 있는데, 그럴수록 삶에 대한 애착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비단 나뿐 아니라 현재 기도 절개술 후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살고 있는 분들을 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내 주변의 몇몇 루게릭 환자들 역시 발병 초기에는 자살을 끊임없이 생각했으며, 절대로 기도절개와 호흡기는 하지 않겠다고 말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 역시 나중에는 호흡기에 의지한 삶의 연명을 받아들이고 투병 생활을 그런대로 잘 해나가고 있으며, 자신들만의 사는 방법을 터득하여 나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건강한 사람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사는 것 보다는 그냥 죽는 게 나을 거라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장애를 입기 전, 즉 루게릭이 걸리기 전에는 장애인이나 중증 환자에 대한 편견이 가득한 사회에서 중증 장애인들을 보면서 쉽게 “저렇게 살면 뭐하나”, “저렇게 사느니 죽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들 때문인지 치료가 불가능하고 결국 고통스럽게 살다 죽을 거라는 의사의 말은, “결국 언젠가 죽을 건데, 언제 죽는 게 뭐가 의미 있나, 그냥 지금 죽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으로 까지 이어지곤 했다.
언젠가 TV에서 이혼에 관한 논쟁을 하는 것을 봤는데, 소위 전문가라는 분들이 나와서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를 하면 시청자들은 그들의 말이 다 옳고 정답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문가란 분들 가운데 이혼을 경험한 분들은 거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혼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의 말은, 설령 그들이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논쟁을 지켜보는 이혼 경험자들에겐 설득력도 없으며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생각만 든다고 당사자들이 말하는걸 봤다. 나 역시 환자의 입장이 또 장애인의 입장이 되기 전에는 죽음이나 자살, 안락사 같은 것에 대해 쉽게 이야기하고 결론지었지만, 루게릭에 걸려서 전신이 마비되고 언제까지 살게 될지 모르는 현재 상황에서는 이전과는 많은 생각을 다르게 가지고 있다.
얼마 전, 루게릭 진단을 받은 캐나다 교포 한 분과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캐나다에서는 발병 후 진단 시부터 7명의 전문가와 상담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의사는 물론 간호사, 사회복지사, 장애인단체 관계자, 보호자 등이 모여 앞으로 환자가 투병해 나가는데 필요한 것과 도움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부터 세운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우리나라의 현실과 비교해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의사의 5분 진료를 통해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이야기만 듣는다. 두 번째 진료시 발병 원인이 무엇인지 혹시 산재가 가능한지 앞으로 어떤 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등 나름 몇가지 궁금한 사항을 적어 갔지만 진료 대기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답을 반도 듣지 못하고 5분만에 쫒겨나듯 진료실을 나왔다. 그후에도 세달에 한번씩 정기 진료를 가지만 약을 처방 받으러 가는것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모든 것이 가족과 당사자의 몫이며, 지금처럼 현실을 수긍하며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편견, 제한되고 비현실적인 복지 정책 속에서 스스로 살길을 찾아 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회적 현실 속에서 ‘안락사’나 ‘무의미한 치료연장 중단’과 같은 논의가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이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건 살고 싶다는, 살려달라는 간절한 표현이라고 한다. 나 또한 “죽어야지” 라고 말하는 루게릭 환자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들이 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고통 받는 가족들을 생각할 때 자신이 그들에게 짐이 되고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하기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죽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을 하지만 그래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로또에 당첨이 되면 끝까지 살 것이라고 주변에 말을 하곤 한다. 만약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가족들에게 환자 간호에 대한 경제적, 육체적, 심리적 부담을 덜어 줄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한 오래 살아서, 나의 자식들이 성장하는 모습,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싶고, 가족의 구성원으로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마음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안락사나 무의미한 삶의 연장과 같은 고민에 앞서 사회적으로 환자와 가족들의 삶의 질 향상 문제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생명을 유지 시킬 수 있는 방법, 좀 더 구체적으로 장애인으로 혹은 말기 환자로서 삶의 질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논의가 충분하지도 않는데 안락사를 논의한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고통과 부담을 주면서 하루하루 삶을 연장해서 사는 사람들에게 “가족과 사회에 더 이상 고통을 주지 말고 죽는 게 어떠냐”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죽음은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강요이다. 그런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사회적 논의보다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말기 환자들의 삶의 질과 가족 지원에 대한 다양한 방법들을 찾는 논의부터 시작하는게 옳다고 생각한다.
현재 자살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매체를 통해 많이 접해왔다. 자살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경우는 우울증 같은 정신적 어려움을 경험한다고 들었다. 안락사를 요구하는, 또는 요구받는 말기 환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쩌면 그들 역시 육체의 고통과 더불어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로 인해 죽음을 앞당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학계는 무엇보다 나 같은 말기 환자와 그 가족들의 삶의 의미부터 충분하게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닌지, 또 한국에서 말기환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말기 환자의 가족들은 왜 고통 받고 있는 지에 대한 연구부터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지금 루게릭에 걸려서 전신이 마비되고 있는 상태에 살고 있고, 언제까지 오늘처럼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얼마 후에는 호흡마저 기계에 의지해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나는, 겉으로는 “빨리 죽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는 분명코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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