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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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희 작성일 11-06-07 23:50 조회 2,460회본문
“정희야. 병을 앓아야 되겠다.”
“병이요? 제가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가요”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왜 제가 병을 앓아야 해요? 그리고 그 병은 어떤 병인데요?”
그 분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셨다.
“참 힘들고 외로운 병이다. 아무것도 혼자서 할 수 없는…손도 움직일 수 없고, 다리도 움직일 수 없고, 마침내는 서 있을 힘도 없어서 눈만 깜빡 깜빡하며 누워 있다가 소리 없이 죽어가는 병이다.”
“그런 무서운 병을 왜 제가 앓아야 해요?”
“세상도 모르고 죽어가는, 본인조차도 모르면서 조용히 떠나가고들 있단다.”
“그럼. 저도 그렇게 앓다가 떠나가요? 선생님께서 고쳐주시면 되잖아요.”
그 분은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언제까지 앓으면 되나요? 아버지의 명령이신가요?”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다. 내가 항상 니 옆에 있는 것을 믿느냐?”
“네. 그러나 저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붙잡아 주십시오.”
그 분은 또 나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셨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나직이 말씀하셨다.
“다 잃었다고 생각될 때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순명’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벌써 17년이 되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그 동안 아름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리고 듣기도 하였다.
숭고한 사람. 의로운 사람. 친절한 사람. 헌신한 사람…
긴 시간동안 또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물질 또는 작은 물질.
오랜 위로 또는 스쳐가는 위로.
사람이 이렇게도 아름답고 고운 성품을 갖고 있었던가?
나는 이 병을 앓으면서 늘 감격하였다.
헌신적인 남편의 사랑을 보여주고 5년전 그분은 좋은 곳으로 떠나가셨다.
시간은 구름처럼 지나갔다.
딸이 교회에서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
병든 장모님을 모시겠다며 사위가 되겠다고 했다.
딸은 결혼을 하여 외손녀를 내 가슴에 안겨주었다.
시간은 또 흘러갔다.
인공호흡기를 끼고 누워서 바우처 회원들의 친절한 보살핌도 받고 있다.
새벽이면 자세를 바꿔주는 사위의 손길과 또 어떤 날은 수면제를 먹여주는 딸의 졸린 눈동자를 희미하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시간은 바람처럼 또 스쳐갔다.
아들이 결혼할 여자 친구를 내 침상 옆에서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지나고 안사돈과 내 침상 옆에서 두 손을 맞잡았다.
하늘이 보고 싶다는 내 소원은 언제부터였던가?
언론은 루게릭을 앓고 있는 나를 소개할 때마다 ‘반지하 전세’ 딱지표를 붙여주었다.
시간은 또 여름 햇살 서산으로 넘어가듯 흘러갔다
나는 오늘 4층 빌라에서 북한산 비봉을 바라보고 있다.
어제 며느리는 아기 초음파 사진을 내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간다.
일주일 간격으로 친구는 내게 찾아와 주사를 손등에 꽂아주고 책을 읽어준다.
읽어 주는 책을 들으면서 나는 사위가 그린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기도하는 두손을 바라본다.
시간은 또 지나갈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고 또 곽재희씨가 들려주는 루게릭병 보호자들의 헌신적인 마음들의 소식을 계속 들을 것이다.
아. 17년의 시간은 이렇게 흘러간다. 그분의 말씀처럼 다 잃은 듯 하였는데 많은 것을 다 얻었다.
고마운 분들이여.
내 고난을 덜어준 아름다운 분들이여!
아직도 함께 손잡고 저 산을 넘어 갑시다.
2011년 6월 어느 저녁 루게릭 환자 이정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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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신님의 댓글
신도신 작성일안녕하세요. 신도신환우 딸 안효숙입니다. 글로 라도 뵈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나날이 더 건강해지시길 기도합니다.